경원재(敬源齋)는 숭조와 화합의 상징이며 불멸의 전당입니다
소재지: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준공일:1999년 2월 27일
▲경원재 전경
양자산 산기슭, 1천여 평의 대지 위에 우아하고도 고전미 넘치는 본전과, 양 옆 날개로 펼쳐진 조연사(肇延祠)와 현덕사(顯德祠), 그 아래 양 열로 선 회랑과 미(美)의 극치를 이루는 영흠문(永欽門), 그리고 고풍을 빚어 만든 담장 등으로 이루어진 일군의 건축물이 있으니 이름하여 경원재(敬源齋)입니다.
경원재는 숭조와 화합의 상징이며 불멸의 전당입니다. 시조 박사공을 비롯한 상세조의 제향을 받들어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위업을 현창하고, 후손들의 돈목과 화합을 꾀하며 자손만대에 전승해야 할 정신적 구심체이고, 일족의 동질성 확인을 위한 요람이며 십만 종원의 근본이 살아 숨쉬는 거대한 뿌리이고, 우리 모두가 소중히 보존해야 할 가치로운 문화재입니다. 경원재는 종사를 종교로 승화시켜 조상의 부름에 헌신 진력한 몇몇 분의 선도에 따라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념비적 존재입니다. 강물처럼 도도히 살아온 8백년의 역사 위에 우뚝 선 금자탑이며, 전국에 산거하는 8백여 종원의 헌성금으로 이룩한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더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1995년 제38차 정기총회('95. 4. 23)에서 박사공 재실 건립을 의결하였습니다. 당초에는 통영시 도산면 원산리 선산에다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에는 건립이 불가능함을 확인하고, 제40차 정기총회('97. 4. 27)에서 박사공 재실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산26번지 선산으로 이설 봉축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7년 8월 21일 이곳 양자산 길지에 시조 박사공의 분묘 조성과 경원재 신축의 첫 삽을 꽂았던 것입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척되어 1997년 10월 14일 재실의 주 건물인 본전의 상량에 이어, 1998년 6월에는 준구공(俊龜公) 묘성공(昴成公) 경성공(景成公)의 단비가 봉설되었으며, 1998년 10월에는 본전 공사가 완성되었고, 1999년 1월 28일 드디어 박사공묘의 성분과 묘역공사가 완료됨으로써 오매불망, 10만 종원의 숙원이던 경원재의 대역사(大役事)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증축전 경원재 본당의 옛모습 ⓒ 김수영
그리하여 1999년 2월 27일 6백여명의 후예들이 참사한 가운데 시조 박사공묘 고유제 및 경원재 준공의 화려하고도 역사적인 테이프를 잘랐던 것입니다. 모두는 북받쳐 오르는 기쁨을 억제치 못하고 그 감격에 흐느꼈습니다.
재실은 1,016평의 대지 위에 처음에는 본전은 열 네평 남짓한 넓이로 송판을 깐 마루로 제각을 겸하고, 양 회랑은 각기 3백명씩 도합 6백명의 제관을 전천후로 수용하는 현대시설로 치장하였고, 예술미의 극치를 보는 정문인 영흠문, 정문을 중심하여 좌우로 1.5m 높이의 아담하고 고풍스런 담장이 둘리어져 재실의 운치를 더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신주를 모시는 현덕사가 증축되고, 2005년 본전의 확장증축과 조연사의 증축 등으로 경원재는 명실공히 국중화족이요 영락세족의 재실로서 손색없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정문 안뜰 양 쪽에는 경원재 건립에 많은 성금을 헌성하여 숭조애손정신의 귀감이 된 종원들의 헌성기념비를 건립하여 그들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 있습니다.
▲경원재 현덕사 조연사의 위용 ⓒ 김수영
옛 문헌에 이르기를 "문벌을 말할 때는 으례 연김(延金)을 들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연안김씨는 오래 전부터 문벌세족으로 살아온 명문거족이었음을 증명합니다. 훌륭한 조상을 가진 후예로서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영명한 슬기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오늘에 재현하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국에 산거하는 10만 종원은 경원재를 중심으로 열세조의 찬란한 위업을 흠모효칙하며, 천만혈족이 대동단결하며,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도모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은 오직 자손이 번성한 씨족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