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 역사





●양평선영(楊平先塋) 중심의 종사(宗史)
우리 연안김씨가 양평에 선산을 마련한 것은 세종조에 6세 나복산인공의 배위이신 죽성부인 안씨를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능골에 치장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건위이신 나복산인공의 명성이나 아드님 4형제의 당시의 지위로 보아 호상이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나라에서 준예장으로 치장케 하였음은 분묘의 규모나 체제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죽성부인 장례 후 세종 7년(1425년)에 문익공의 장의를 모시었고, 세종 17년(1435년)에 문정공과 배위 평양조씨를 치장함으로써 우리 연안김씨의 세장지가 되었다.
이후 양평 대선산은 대장군공계의 숭선목조의 구심처가 되어 연례행사인 세일제를 행사하고 그 제일(祭日)에는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회동하는 계기가 되어 대소 종사를 논의 실행하는 회의장으로 겸행하여 왔다. 이 때의 주관은 문장(門長)이나 문장이 지명한 종인이 대행하였다. 이는 보계에 종손이 궐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근세까지 종사가 이어져 내려오다 1942년 양평재실에서 양평선영수호보존회를 창립하여 전문 38조의 규약을 제정하고, 회장단과 고문, 상임이사 등을 선임하여 근대식 조직과 운영제도를 정립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1973년에 대종회로 통합되어 그 이후에는 대종회에서 양평 대선산 수호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연대순으로 주요 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조 양평 대선산 치장
1420년에 6세 나복산인공 배위 죽성부인안씨(竹城夫人安氏) 치장(治葬)
세종7년에 7세 문익공(휘 여지) 장례
세종17년에 7세 문정공(휘 자지) 장례
1546년 투장(偸葬)사건 발생
문중의 성쇠와 부침에 따라 선산수호에 무수한 곡절이 있었으니 중종(中宗)말 정유옥화로 영의정 근사공께서 하동으로 유적되시고 좌의정 안노공이 사사 당하여 연김일문이 극도의 침체에 빠져있는 틈에 좌군사정공의 손서 광산김책 부자의 시신이 죽성부인묘 상단에 투장되었다. 7년후 1553년 문중의 고발로 관에서 강제로 굴총하였다.
1660년 개사초회문(改莎草回文)
1660.12,7 당시 흡곡현감 군석(君錫)공께서 전국 종문에 사초회문을 발송하였다.
1830년 왕충리춘추양등묘제록(王忠里春秋兩等墓祭錄)
선영묘제와 위토상황은 순조30년(1830년)이전까지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고, 20세 대사성 선공께서 왕충리춘추양등묘제록을 서록하였다.
1929년 시향절목(시향절목) 제정
1942년 선영수호보존회 창립
1943년 선영수호보존회 주관 시제봉행 및 선영수호보존회 제1회 정기총회
1960년 문익공 배위 서원이씨 초계정씨 단비 봉설
1967년 밀직제학공 양위 봉단
1969년 나복산인공종회(나복산인공종회) 창립
1970년 대선산 임야를 나복산인공종회 명의로 이전
김만수외 108인 공동명의의 총11필지(52정2반2묘)의 임야를 특별조치법에 의하여 1970.7.28 나복산인공종회로 이전 등기
1971년 재실 중건
1973년 대종회에 통합


●대종회(大宗會)의 설립과 발전
1954년 3월 30일(음) 청주시 내덕면 종록(鍾祿)씨 댁에서 경향의 60여 종원이 모여 연안김씨화수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칙을 제정하여 종장(宗長) 도연(道淵), 회장 철수(哲秀), 부회장 사성(思成) 사규(思奎) 종록(鍾錄) 낙기(洛基) 창영(瓚泳), 상임이사 사인(思仁)씨 등을 선출하여 2년 6개월여 존속하면서 양평 죽성부인(나복산인공 배위) 위토전답이 타인에게 농지분배된 것을 자금을 갹출하여 환원 하였고, 죽성부인 묘비를 개수(改竪) 하였으며 대동보 발간을 발의 하였다. 그러다가 1956년 서울에서 대종회가 창립됨으로써 화수회는 잔무를 인도(引渡)하고 자진 폐쇄 하였다.

연안김씨 대종회는 1956년 9월 9일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사봉(思鳳)씨 댁에서 사봉 낙기(洛基) 안기(安基) 한영(翰泳) 종철(鍾喆) 경엽(敬燁) 종석(鍾奭) 욱영(旭泳) 사집(思潗) 사학(思學) 사훈(思勳) 사성(思成) 찬영(瓚泳) 종찬(鍾瓚) 종한(鍾漢) 용기(龍基) 일주(一柱) 돈영(敦泳) 사규(思奎) 종성(鍾聲) 봉기(鳳基) 사승(思昇) 관영(寬泳)씨 등이 모여 연안김씨대종회 창립총회를 개최 하였다. 임시의장에 사성(思成)씨를 추대하여 대종회 규약을 제정하고 회장 찬영(瓚泳), 부회장 사성 사봉 사집, 상임이사 종찬 종성 한영,이사 <서울> 낙기 안기 경엽 종철 종한 종익(鍾翊), <음성> 사규(思奎), <진천> 돈영, <평창> 종근(鍾根), <예산> 종태(鍾泰), <청주> 종록(鍾祿), <시곡> 관영(寬泳), <파주> 욱영(旭泳), <원주> 사승(思昇), <부평> 석기(碩基)씨 등을 선출하여 명실 공히 연안김씨대종회를 발족하였다. 이날 총회에서는 (1) 양평 죽성부인(竹城夫人) 묘지기 교체위원에 낙기 종찬씨 (2) 고양 대자리 임야 90정보중 45정보를 공동소유로 회복등기 (3) 대동보 발간추진 (4) 제1회 화수회를 9월 30일 개최할 것 등을 의결 하였다. 그리고 임시비용은 찬영 태영(泰泳) 종익 낙기 한영 사성 경엽 사훈 안기 사봉 사학 사규 사집 사일(思馹) 욱영 종성 돈영 종찬 종한씨 등이 갹출 하였다.

10만 종원의 총수로써 그 책임이 막중한 회장만 하여도 초대회장 찬영(瓚泳)씨, 2대회장 수영(壽泳)씨, 3대 회장 종성(鍾聲)씨, 4대 및 7대 회장 주용(柱容)씨, 5대 회장 원기(元基)씨, 6대 회장 종갑(鍾甲)씨, 8대 및 9대 회장 대영(旲泳)씨, 10대 회장 덕영(悳泳)씨에 이르고 있으며, 연김의 청사에 빛으로 남을 종사로는 1956년 9월 30일 덕수궁 정관헌(精觀軒)에서 의친왕비를 비롯한 경향의 180여 종원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던 제1회 화수회, 1957년 정유(丁酉) 대동보 발간, 1961년 통영의 고려 문하찬성사 우(祐)공 묘역에 시조 박사공과 호부 원외랑공, 대장군공, 처사공, 판도판서공의 제단을 봉설하여 조부손(祖父孫) 5위를 동일 단역(壇域)에 모셨고, 1982년 6월 세사(世史) 1집 발간, 1984년 11월세사 2집 발간, 1987년 정묘(丁卯)대동보 발간, 1990년 7월 전농동 회관을 정리하고 신림동 회관으로 이주 하였으며, 1999년 2월 양평에 시조 박사공의 분묘조성 및 경원재 준공, 1999년 12월 미래 종사의 주역인 청․장년회 창립, 2000년 5월 부녀회 창립, 2001년 10월 연안김씨 약사(略史) 발간, 2003년 12월 세사 3집 발간, 2006년 12월 31일 병술 대동보를 CD-ROM과 함께 발간하고, 2007년 4월 8일에는 뜻 깊은 대종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거행 하였다.

이는 오로지 위로는 조상의 위업을 현창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돈목과 화합을 꾀하는 10만 종원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